향토사

임진왜란과 조선 선조당쟁

아지빠 2018. 3. 26. 09:44






선조의 즉위와 당쟁

선조는 조선왕실에서 직계가 아닌 방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이 된 인물이다.

명종은 인순왕후와 사이에서 순희 세자를 두었으나 명종18년(1563년)외아들인 세자가 13살로 요절했다. 이후 명종은 계비를 맞지 않은 상태에서 명종22년(1567)승하했고 조선역사상 처음으로 왕실의 적통에서 후계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15세기후반부터 사림파(士林波)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정치세력인 훈구파(勳舊波)와 대립했다. 네 번에 걸친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네 번의 사화(士禍)에서사림파는 적지 않는 피해를 당하면서 중앙정계에서 숙청을 당했다.

그러나 사림파는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입지를 확산시켜나갔고 명종20년(1565 문정왕후 사망 후 외척정치가 종식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선조 시대는 사림파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당쟁이 시작되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선조시대 학계와 정계의 중심이 된 대표적인인물이 이황(李滉).조식(曺植) 이이(李珥)이준경(李俊慶)류성용(柳成龍)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이산해(李山海)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신흠(申欽)이수광(李晬光)인데 이들은 사림파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들이다.

사림파가 집권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그들 내부 간에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다. 외척정치를 비판하는 비판자의 위치에서는 사림파가 한목소리를 냈지만, 이제 정치 주도층이 되면서 학파의 성향이나 지역적 기반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선조8년(1575)이조(吏曺)에서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전량직을 둘러싸고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이 대립하면서 당을 달리하는 분당이 이루어 졌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주로 한양과 경기지역에 기반을 둔 기호학파(畿湖學波)의 학자들이었으며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학문을 이은영남학파(嶺南學波)였다.

당시 김효원의 집이 한양의 동쪽인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한양의 서쪽인 정릉방에 있다 하여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부르게 되었다.

선조8년(1575)동인과 서인의 분당이후 본격화된 당쟁은 선조22년(1589)의 정여립(鄭汝立1546~1589) 역모(逆謀)는 마감되는듯했지만 그와 연루된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었으며, 본격적인수사가 시작 되었다.

특히 선조는 서인의 강경파 정철을 위관(委官) 즉 수사 책임자로 임명했고, 이후사건의 파장은 확대 되었다. 선조의 입장에서도 천하는 공물(公物)과 같은 과격한 주장을 하는 동인 강경파의 척결이 급선무 였고 서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동인은 특히 화담학파(花潭學波)와 남명학파(南冥學波)의학자들의 피해가 컸던 반면 같은 동인이었던 퇴계학파에서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선조22년 1589)의 파장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다.

같은 동인의 퇴계학파의 중심 류성용이 기축옥사 대공세에 미온적인태도로 일관하자 화담학파와 남명학파는 퇴계학파에 분노했다. 이사건을계기로 동인의 한축을 이루었던 화담학파와 남명학파는 북인으로 퇴계학파는 남인으로 갈라섰다.

선조대 후반의 당쟁은 서인과 남인 북인인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정철(서인)과 윤두수(尹斗壽 서인) 류성용(남인)과 이원익(남인) 이산해(북인)와 정인홍(鄭仁弘북인)이 훗날 각 당파의 수장으로 활약했다.

선조의 즉위 후 사림정치 시대가 본격화 됐지만, 사림파간의 정치적 다툼은 조선중기 이후 정치적으로 당쟁의 시대가 열리는 단서를 제공했다.

선조 후반의 당쟁.

조선시대. 1575년(선조 8)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붕당정치가 처음 시작된 이래로 당파 간의 경쟁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선조 후반 서인과 북인 간에는 치열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으며, 북인이 집권 세력이 된 후에는 북인 간에 다양한 분열이 일어났다. 특히 적장자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인해 선조의 후계자 계승 구도가 복잡하게 전개되면서 북인의 분열은 가속화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역사를 가장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건창(1852~1898)의『당의통략(黨議通略)』에는 당시의 당파 분열과 인물 간의 갈등 요인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이산해와 홍여순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는 대북이라 하고 남이공과 김신국을 우두머리로 하는 자들은 소북이라 하였다. 소북이 왕의 견책을 받음에 미쳐 이산해와 홍여순이 또 서로 더불어 권력을 다투어 이산해의 당은 육북(肉北)이 되었고, 홍여순의 당은 골북(骨北)이 되었다. 이이첨이 상소하여 홍여순을 탄핵하자 임금은 둘을 내쫓고 다시 서인을 참여시켜 나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체찰사인 이귀가 스스로 영남에서 돌아와 정인홍이 고향에 거주할 적의 불법적인 일을 논하자 정인홍이 뒤에 상소하여 “신은 성혼, 정철과 더불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고 또 유성룡과도 유쾌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 무리가 신을 미워함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성혼이 최영경 을 얽어 죽이고 나라가 어려울 때 (왕의 피난처에) 이르지 않고 화의를 주장한 모든 일을 심하게 꾸짖었다. 아울러 정경세가 상중에 술을 마신 것을 탄핵하였다. 대사헌 황신이 뒤에 성혼의 무고함을 상소하였는데 왕이 황신을 교체하고 조정에 있는 모든 서인을 내쫓고 간사한 성혼, 독한 정철이라는 교서를 내렸다. 유영경을 이조판서로 하고 정인홍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항복은 평생에 당이 없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유영경이 이조판서가 되는 것을 막고자하였다. 그러므로 당에서 탄핵당하는 바가 되었고 정철의 심복으로 지적되어 이로써 정승직 을 면하게 했다. 정인홍은 왕의 부름을 받자 먼저 최영경을 국문했을 때 대간으로 있었던 구성의 죄를 논하여 유배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유영경이 정승이 되어 정치를 전임하자 정인홍의 무리를 많이 파면하고 교체하였으며 오로지 소북만을 등용하였다.」

위의 기록에는 북인 내의 소북과 대북, 육북과 골북의 분열상과 기축옥사, 성혼과 정철에 대한 탄핵 등을 빌미로 북인이 서인을 탄핵하고 권력을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항복처럼 평생 당을 하지 않아도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당인(黨人)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유영경은 선조 후반 후계자로 영창대군을 지지하면서 선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광해군을 후계자로 지지한 정인홍과 치열한 대립을 하였다. 다음의 기록은 후계자 지명 문제가 당파의 분열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처음에 광해군을 세자로 봉한 지 20년이 되었다. 누차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청했지만, 중국 조정에서는 임해군이 장자라는 이유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임해군과 광해군은 모두 공빈 김씨1)에게서 태어났는데, 임해군은 광폭하여 많은 덕을 잃었고, 광해군은 살피고 어루만진 공로가 있어서, 의인왕후가 일찍이 취하여 아들로 삼아서 궁중 안이나 밖에서나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여 다른 말이 없었다. 의인왕후가 죽자, 예관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책봉을 청하고자 하니 왕이 말하기를, “왕비 책봉은 청하지 않으면서, (세자의) 책봉만 청하는 것은 어째서 인가.” 하였다. 마침내 인목왕후를 책봉하였는데, 그 뒤에 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영상 유영경이 세종 때의 광평대군과 임영대군, 두 대군의 예를 취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를 베푸니, 좌상 허욱 과 우상 한응인이 말하길, “대군 한명이 태어났다고 어찌 반드시 하례를 베풀겠소.” 하니, 유영경이 이에 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유영경이 왕의 뜻을 받들어 대군의 입지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왕에게 병이 있어 은밀하게 세자에게 전위하는 전교를 내려 모든 정승을 불렀는데, 유영경이 말하길, “지금은 시상(時相:현재의 재상)을 부르는 것이니, 다른 정승들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다른 정승들이 모두 물러갔다. 유영경이 홀로 계를 올려 (전위 교서를) 거두어 줄 것을 청하며 말하길, “오늘의 전교는 여러 사람들의 뜻 밖에서 나온 것이니 신은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병조판서 박승종이 유영경과 더불어 꾀하여 군사를 동원하고 궁궐을 호위하며 비상사태에 대비하니, 인심이 흉흉해져 모두가 말하기를, “유영경이 세자를 세우지 못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1) 원문에는 박 씨로 기록되어 있으나, 광해군의 생모는 공빈 김 씨이다. 아마도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박 씨이므로 이를 착각한 오기로 보인다.

1592년 임진왜란은 왕실과 정치 세력의 세력 판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방어선이 뚫리면서 위기를 맞은 국왕 선조는 서둘러 피난길을 재촉하는 한편,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고 분조(分朝:조정을 나눔) 활동을 통해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도록 했다. 18세의 나이에 왕세자로서 분조를 이끌며 대 왜 항쟁에 나섰던 광해군은 강력한 주전론을 전개한 정인홍 등의 북인과 호흡이 잘 맞았다. 의주로 피난해 백성의 원성을 들었던 선조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야의 명망은 광해군에게 쏠렸고 광해군의 왕의 계승은 무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602년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한 후 인목왕후가 계비로 들어오면서 왕실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였고, 후궁인 공빈 김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왕자 곧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었다. 임해군은 이미 자질에서 문제가 드러났으므로 선조는 왜란이라는 국난의 시기를 맞아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후궁 출신의 아들이라는 점은 선조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의 마음을 파고 든 것은 어린 계비가 낳은 영창대군이었다. 1606년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본 선조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정에도 감지되어 선조의 환심을 사고자 영창대군의 세자 책봉을 은근히 청하는 세력들도 생겨났다. 정치판의 줄서기는 과거나 현대나 마찬가지이다. 영창대군의 탄생을 계기로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분립되었다.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이 자리를 잡았다. 정인홍은 광해군의 후계자 지명을 저지하려는 유영경을 강력히 탄핵하였다.

「정인홍이 개연히 고향에서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유영경은 성지를 비밀로 하고 여러 재상들을 쫓았으니 이른바 여러 사람의 뜻이라는 것이 나라 사람들이 원하지 않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사로운 당들이 하고자 하지 않는 바입니까?” ... 왕이 심히 노하여 말하기를, “인홍이 세자로 하여금 속히 왕위를 전해 받게 하려고 하니 신하된 자가 차마 옛날 왕을 물러나게 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광해군이 매일 문안을 하면 왕은 번번히 꾸짖으며 말하기를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라 하겠는가? 문안을 다시는 오지 말라.” 광해군은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하였다. 대간 이효원 등은 정인홍을 탄핵시켜 군부를 동요시키고 골육간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이산해를 거론하고 이경전과 이이첨 등을 아울러 논하여 다 귀양을 보냈다. 진사 정온이 상소하여 정인홍을 구하려 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이때 허욱, 성영, 최천건, 홍식, 성준구, 이효원, 이유홍, 김대래, 송응순, 이덕온, 송전, 송일, 남복규, 유성, 박승종, 유영근, 유영순, 이정, 이경기, 박이장, 황섬, 황하, 황근중, 조명욱, 성이문, 민경기, 박안현, 신광립, 신요는 모두 유영경을 지지했는데, 이들을 유당(柳黨)이라 이른다. 김신국 또한 유당에 들어갔고 남이공, 김시국, 남이신, 박이서, 임연, 임장은 유영경에게 붙지 아니하여 남당(南黨)이라 불렀다. 유희분은 비록 광해군과의 연고 때문에 대북과 더불어 일을 계획하였으나 본래 소북이었다. 더욱이 남이공과 더불어 친한 까닭으로 또한 남당(南黨)이라 칭하였다. 이것은 모두 소북 중에서 또 갈라져 둘이 된 것이다. 상이 승하하자 광해군이 당일 즉위했다. 이산해를 원상으로 삼고 정인홍과 이이첨을 석방시켜 탁용하였다. 유영경과 김대래를 죽였다.」

유당(柳黨), 남당(南黨)이라 하는 것은 현재 ‘친이계’, ‘친박계’라고 하는 상항과도 유사하다. 유영경의 영의정 임명과 소북 정권의 수립은 선조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고, 영창대군의 왕의 계승은 상당한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의 급서로 정국은 일변한다. 아직 어린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을 불안해한 선조는 마지막 유언에서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던 광해군을 국왕의 자리에 올릴 것을 명했다. 16년간의 세자 생활을 어렵게 청산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국은 일순간에 대북정권 중심으로 짜여졌다. 광해군이 불안한 위치에 있을 때 ‘정권의 실세’ 유영경을 탄핵하다가 귀양길에 올랐던 정인홍은 곧바로 석방된 후 정권을 뒷받침하는 산림(山林)의 영수로 떠오르면서 정권을 지원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선조 사후 후계자 계승을 둘러싼 뜨거운 정쟁 속에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유영경은 처형으로 생을 마감했고, 광해군을 지지했던 정인홍은 광해군 정권 수립 후 ‘왕의 남자’가 되어 정치와 사상계의 일선에 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선조 후반 북인과 서인의 대립, 북인 내의 자체 분열이 끝없이 이어갔다.

▶ 宣傳官宴會圖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於是 主山海汝諄者 爲大北 主以恭藎國者 爲小北 及小北被讉 而山海汝諄 又相與爭權 山海黨爲之肉北 汝諄黨謂之骨北 李爾瞻疏 劾洪汝諄 上兩黜之 復叅進西人 未幾 體察李貴 自嶺南還 論鄭仁弘 居鄕不法事 仁弘疏卞曰 臣與成渾鄭澈 不相能 又不快於柳成龍 今其徒嫉臣如此 因極詆渾搆殺崔永慶 不赴國難 主和議諸事 幷劾鄭經世 居喪飮酒 大憲黃愼 疏卞渾誣 上遞愼 悉逐西人在朝者 有奸渾毒澈之敎 以柳永慶爲吏判 鄭仁弘爲大憲 李恒福 平生無黨 至是欲沮永慶吏判 故爲其黨所劾 指爲鄭澈腹心 以此免相 仁弘赴召 首論崔永慶再鞫時臺諌具宬之罪 竄之 未幾 柳永慶 爲相專政 仁弘等多罷遞 專用小北]

[初光海君册儲二十年. 累遣使請封 中朝以臨海君居長 持之不許. 臨海光海皆恭嬪朴氏出 臨海狂暴多失德 光海有監撫功 懿仁后甞取而子之 中外皆屬心無異辭 及懿仁后薨 禮官復欲遣使請封 上曰 不請册妃而請封何也. 遂册仁穆后 後后生永昌大君. 領相柳永慶 援世宗時廣平臨瀛二大君例 率百官陳賀 左相許頊右相韓應寅 曰一大君生 何必陳賀 永慶乃止. 然人皆永慶疑迎上意 爲大君地也 上有疾 密敎傳位于世子 招諸相 永慶曰 今召時相 他相不得與 他相皆退. 永慶獨啓請收曰 今日之敎出於羣情之外 臣不敢承命. 兵判朴承宗 與永慶謀 勒兵扈宮 以備非常 人心洶洶 皆言永慶 不欲立世子]

[仁弘慨然 自鄕呈疏曰 柳永慶秘聖旨 而逐諸相 所謂羣情者 國人之不願歟 抑私黨之所不欲歟 ... 上怒甚曰 仁弘欲令世子 速受傳位 爲人臣者 忍以退舊君 爲能事哉 自此光海 每問安 上輒責之曰 未受冊命 何以稱世子 問安其勿更來 光海伏地嘔血 臺諫李效元等 劾仁弘 動搖君父 離間骨肉 幷論山海 幷論慶全及爾瞻等 悉竄之 進士鄭蘊 疏救仁弘 不報 時許頊 成泳 崔天健 洪湜 成俊耈 李效元 李惟弘 金大來 宋應洵 李德溫 宋(馬+專) 宋馹 南復圭 柳惺 朴承宗 柳永謹 柳永詢 李瀞 李慶禥 朴而章 黃暹 黃昰 黃謹中 曹明勗 成以文 閔慶基 朴顔賢 申光立 申橈 皆右永慶 謂之柳黨 金藎國 亦入柳黨 南以恭 金蓍國 南以信 朴彝叙 任兗 任章 不附永慶 謂之南黨 柳希奮 雖以光海故 與大北計事 然本小北 尤與以恭善故 亦稱南黨 此皆於小北中 又歧爲二者也 上昇遐 光海卽日卽位 以李山海爲院相 釋仁弘爾瞻擢用之 戮柳永慶金大來]

   

조선 사화 및 환국

조선의 처음 기득권

즉 정치의 주도 세력은 훈구파였다. 훈구 세력에 대항해 지방의 세력이 정치판으로 뛰어든 집단은 사림~

훈구와 사림은 정치의 주도세력이 되고자 끈질긴 싸움이 벌어진다. 기득권을 놓지 않을려는 훈구와새로운 주류가 되기를 원하는 사림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대로 사림 승~

사림은 어떠한 방법으로 기득세력인 훈구를 건들고 이겼을까?

사림은 삼사를 장악한 뒤 훈구의 비리를 가열차게 비판한다.

이에 훈구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라는 사화로 무자비한 반격을 가하지만

끝도 없이 밀려오는 사림에 무릎을 끓는다.

(무오사화1498년)

김종직이 세조를 항우에 비유하는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 하고그 무리들을 능지처참 하라는 내용 연산군 4년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던ㅈ것이 발단이 됨.

(기묘사화1519년)

조선 중종때 조광조는 중종반정 당시 뚜렷한 공로없이 공신이 된 사람들의 공훈을 삭제해버렸다. 이로 인해 훈구파 세력들은 기분이 나빠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을 대거 추출한다.

(을사사화1545년)

어린 나이에 즉위한 왕(명종)을 대신하여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대비와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소윤)이 명종의 아버지 인종의 외숙인 윤임(대윤)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함께 가담했던 사람들이 크게 화를 입었다.

이리하여 16세기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됨. 사림이 완전히 장악을 하였지만 고위직 공무원 티오는 한정되어 있는데 인재들은 넘쳐난다.

뭐 어쩌겠는가, 서로 줄 서는 수 밖에 이것이 붕당의 시초가 된다.

최초의 붕당은 동인과 서인이었다.(붕)당 이름이 동인 서인인 이유는 간단하다‘

당대표가 한쪽은 동대문쪽에 살고 한쪽은 서대문쪽에 살았기때문,

선조 때 동인과 서인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정여립 모반사건 (서인 승)

정철이 선조에게 왕세자 책봉하자고 건의하다가 선조가 열받아서 서인 몰아냄(동인 승))

결국 동인 승으로 끝남.

이 동인은 서인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의견 차이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짐

두번의 임진왜란 후 전쟁 수습 과정에서, 광해군이 많은 역할을 하게 되는데,

광해군의 뒷줄을 대고 있는 곳이 북인 북인이 정권을 잡았다고 생각할 때 쯤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킴 이때 남인도 가담하게 됨에따라

광해군은 폐위되고 북인은 역사 뒤안길로 사라짐 서인과 남인이 남게됨

서인과 남인은 공존하다가 인조때 호란을 겪게 되면서

왕이 오랑캐에게 무릎끓고 절하고.....왕과 지배층은 백성들을 보기 민망해지게됨

당연히 왕실과 양반의 권위는 땅에 떨어짐 땅에 떨어진 권위를 원상복귀 시키고자

예절을 강조함 그리하면서 1차예송 2차 예송논쟁이 생김

근데 이때만 해도 공존하고 괜찮았는데 점차 하나의 당이 쭉 이어가길 원하면서

정권이 확 바뀌는 환국이 발생함 경신환국(1680), 기사환국(1689), 갑신환국(1694) 이렇게 3번의 환국이 발생하는데 이를 숙종이 주도함 .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하들을 싹 물갈이함.

그 중 갑신환국 정리

18대왕 현종과 19대왕 숙종 대에 걸쳐 치열하게 벌어진 서인과 남인의 대결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에서 서인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갑술환국 때 희빈 장씨는 왕비자리에서 쫓겨나고 그 자리에 인현왕후가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희빈 장씨와 가깝던 남인은 몰락하고 인현왕후와 가깝던 서인은 권력을 되 찾았다. 다시 후궁으로 내려앉은 희빈 장씨는 궁궐에 신당을 차려놓고 ,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는다.

그러자 희빈 장씨의 아들인 세자도 위기를 맞는다.

조선 왕조는

사약을 먹고 죽은 여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가,

끔찍한 살육극이 빚어진 기억이 있다.폐비 윤씨의 아들이지만, 이미 세자였기에 왕위에 오를 연산군(10대 왕)이 그 주인공이다 .희빈 장씨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숙종은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를 밀어내고, 연잉군을 후계자로 삼고 싶었다.

그래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세자를 폐할 기회를 살폈다.

그러나 세자는 처신을 잘 해 위기를 벗어나고,숙종이 죽을 때까지 살아남는다

그리하여 연산군에 이어 두번째로 죄인 어머니를 둔 국왕으로 등극했으니,

그가 조선의 20대왕 경종이다 .4년에 걸친 경종의 재위기간은

노론과 소론간의 당쟁이 극한에 치달은 시기다.그렇게 된 이유는

경종이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노론은 경종이 후사를 보지 못 하고 변을 당할 수 있으므로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미리 왕세제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경종은 자신의 건강상태를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였다.그러나 노론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병을 앓고 있는 경종은 2선으로 물러나고. 왕세제인 영잉군이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경종을 두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는 것은

사실 도리에 어긋난 일이다. 그래서 소론 뿐 아니라 노론에서도 반대 상소가 잇따랐다

이때 노론의 핵심 세력은 무리하게 대리청정을 밀어붙인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물러나 유배를 떠났다(1721)식축년에 있었던 이 사건을 신축옥사라 한다.

소론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노론이 역모를 고발했다.

그로 인해 60여 명이 처형당하고 170여 명이 유배되거나 처벌받았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영잉군이 이 같은 역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게 이른다.

비정한 음모와 정쟁잉판치는 가운데 경종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결국 1724년(경종4년) 경종은 3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경종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인군은 자신에게 다가오던 위기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조선의 제21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영조다(1725~1776년을사년)




'향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엔묘지 안장자 명단  (0) 2018.07.27
제석곡의 帝釋菴 암자 부분보수작업완료  (0) 2018.06.11
조선은 명호와 청호를 사용한 증거  (0) 2018.03.21
구글용호동 산야  (0) 2017.07.24
연리지  (0) 2017.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