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
활엽수.쌍떡잎식물. 합판화군. 진달래목.진달래과.진달래속.철쭉
(Rhododendron schlippenbachii)
철쭉은 한자로 '척촉'이라고 하는데 철쭉 척 자에 머뭇거릴 촉 자를 쓴다고 한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 이런 이름이 생겼다하며 산객(山客)이란 이름도 같은 맥락에서 생긴 이름이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전을 보면 철쭉과 관련된 재미있는 수로부인(水路婦人) 이야기가 실려 있다. <신라 성덕왕(702-737)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곁에 있는 돌 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두르고 있어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이것을 보자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저 꽂을 꺾어다가 나에게 줄 사람은 없는가?' 했으나, 사람들은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하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이 때 늙은이 하나가 암소를 끌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가사까지 지어서 부인에게 바쳤는데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이틀을 편안히 가다가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에서 용이 나와 갑자기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이 땅에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또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옛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했으니, 이제 바다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 마땅히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친다면 부인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공이 그 말대로 했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나와 도로 바쳤다. 공이 바다에 들어갔던 일을 묻자, 부인은 대답하기를 '칠보 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로우며 깨끗한 것이 인간들이 먹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는데, 부인의 옷에서 나는 이상한 향기도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 부인은 아름다운 용모가 세상에 뛰어나 매양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면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들려 갔다. 이 때 여러 사람이 부르던 해가(海歌)의 가사는 이러했다.
거북아 ! 거북아 ! 수로를 내놓아라/남의 부인 앗아간 죄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
또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바친 헌화가는 이러했다.
자주빛 바위 가에/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저 꽃 꺽어 바치오리다 >(삼국유사, 이민우 옮김, 범우사간에서 발췌).
수로부인은 천길 절벽에 매달린 철쭉을 따 달라고 할 만큼 주책이 없으며 용왕에게 붙잡혀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용모가 뛰어나서 지나가던 노인도 암소를 팽개치고 절벽에 기어올라 철쭉꽃을 따다 노래까지 지어 받칠 정도이고 걸핏하면 물귀신에게 잡혀 다녔으니 예쁜 부인을 둔 탓에 순정공은 속깨나 썩었겠다.
철쭉 설명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영산홍(暎山紅)이야기이다. 일본인들이 철쭉을 가지고 오랫동안 개량하고 육종하여 사쓰끼철쭉, 기리시마철쭉 등 여러 가지 꽃 모양과 색깔을 가진 수백 가지 품종을 만들었는데 이를 모두 합쳐서 영산홍이라 한다. 일본철쭉이란 이름이 맞는 말이나 영산홍이 더 많이 쓰이고 있는 이름이다. 4∼5월에 걸쳐 무릎높이 남짓한 작은 키에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무더기로 달리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정원수의 가장 대표적인 꽃나무가 되어 버렸다. 영산홍은 일찍 고려때 벌써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종2년(1470) 11월21일 장원서(掌苑署)에서 영산홍 한 분을 올리니, 명하기를, <겨울 달에 꽃이 핀 것은 인위에서 나온 것이고 내가 꽃을 좋아하지 않으니, 금후로는 올리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연산때는 11년(1504) 1월26일<영산홍 1만 그루를 후원에 심으라>, 12년(1505) 1월25일에 <영산홍은 그늘에서 잘 사니, 그것을 땅에 심을 때는 먼저 땅을 파고 또 움막을 지어, 추위에 부딪쳐도 말라 죽는 일이 없게 하라>, 12년 2월2일에는 <영산홍 재배한 숫자를 해당 관리에게 시켜서 알리게 하라>고 하여 조선왕조때는 제법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문헌에 실린 영산홍이 오늘 날의 일본철쭉과 같은 나무인지는 논란이 있다. 영산홍이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일이며 어디까지나 일본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일본의 꽃이다. 따라서 심어서는 안될 장소-예를 들면 고사찰의 대웅전 앞, 심지어 이순신장군의 사당이 있는 한산도의 제승당, 울릉도 도동에 있는 독도박물관 등 분별없이 심겨져 있는 것을 보면 심한 거부 반응을 느낀다. 어떤 이는 나무마저 국수주의적 발상을 한다고 비판할지 모르나 우리의 전통이 있는 곳에는 우리 나무와 우리꽃으로 꾸며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